[역사소설] 이순신의 항명-광화문으로 진격하라 ②

2021-04-05
김동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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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민수(君舟民水)라… 물은 배를 띄우기도 엎어버리기도 하거늘”

 

#악연이 된 인연

백의종군 이튿날, 아침부터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다. 누런 먼지가 가라앉았고 하얀 벚꽃이 활짝 피었다. 겨울을 이겨낸 백옥 같은 목련은 봄의 시샘인가, 꽃비가 되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이순신은 어제 과음을 한 탓인지 속이 쓰렸고 설사를 심하게 했다. 변 주부가 가져온 온백원(위장약)을 먹고 나서야 속이 한결 편안해졌다. 처마 밑 툇마루에 모여앉은 아들, 조카, 변 주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봄비가 자주 내리면 풍년이 들어 인심이 난다고 했다. 허나….”

몇 해 동안 이어진 난리통에 논과 밭은 잡초와 피가 웃자라 피폐해지고 말았다. 농사꾼들은 등짐, 봇짐을 지고 산속으로 피난을 가버렸다. 일부는 화적떼가 되어 관아를 노리는 부류도 있었다. 왜놈과 되놈에게 약탈당하고 유랑 걸식하는 무지렁이들의 고통과 연민 이야기였다. 나라는 백성의 주린 배를 채워주지 못했다. 오히려 어수선한 틈을 타서 탐관오리들은 백성들이 버리고 간 집과 땅을 차지하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지 20일 만에 국왕이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자 분노한 부민들은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을 모조리 불태웠다. 그리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파행적 법 집행을 하던 형조 관아와 노비문서를 관리하면서 애먼 사람을 잡아 족치던 장례원도 불태워졌다. 나라에 혼군(昏君)과 탐관오리만 있을 뿐 백성은 없었다.

“군주민수(君舟民水)라 했다. 군주, 민수….”

이순신은 비장한 어조로 혼잣말을 했다. 백성은 물이요 국왕은 배인데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성나면 배를 엎어버릴 수도 있다. 민심은 천심인데 민심이 왕에게서 이미 떠나버렸으니, 나라에 왕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은 누군가 믿고 따를 사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어젯밤 꿈속에 나타났던 두 자루 칼이 자꾸 떠올라 심란했기에 행랑방으로 들었다.

아침상은 소찬이었지만 주인의 후덕한 마음을 담은 듯 매우 풍성했다. 젊은이들은 보리쌀 고봉밥을 두 그릇씩이나 후딱 비웠다. 상큼한 냉이 나물 등 푸성귀가 올라왔고 풋고추를 썰어 넣은 구수한 된장찌개가 입맛을 돋웠다. 수북이 담긴 백김치는 순식간에 없어졌다. 후식으로 쑥개떡이 나와 포식을 했다.

오전에 이순신은 필공(筆工)을 불러 붓을 매게했다.

“허어, 우리 장군님, 이 와중에 웬 붓이랍니까요? 칼로 쳐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이 수두룩한 마당에….”

변 주부는 먼발치서 궁시렁거렸다.

“아저씨, 아버님은 남행 중에도 일기를 계속 쓰시려는가 봅니다.”

아들 울이 거들었다.

이순신은 무인으로서 평생 칼과 활을 잡았다. 낮에는 무기를 밤에는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래서 부하들은 문무겸전의 장수라고 불렀다.

1592년 임진년 1월 1일부터 전쟁 중에도 거의 매일 빠트리지 않고 지필묵을 챙겨 일기와 국왕에게 올리는 장계를 썼다.

야들야들한 붓털은 예리한 칼날에 비해 비록 작고 보잘것없을 것이나 누가 잡느냐에 따라서 가히 천지를, 적군을, 불의한 놈들을 산산조각으로 쪼갤 버릴 수 있는 괴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때 붓의 털끝 하나하나는 예리한 비수가 되어 뼈를 부수고 골수까지 파버릴 것이다. 이순신의 속에 담긴 담기(膽氣)가 대개 이런 것이었다.

이순신은 항상 옳고 그름에 당당했기 때문에 수많은 시기, 질투, 모함을 받고 투옥까지 되었다. 그는 매사 원리원칙을 지키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하루종일 까치가 까까! 까까! 울어댔다. 저녁 땅거미가 질 무렵 영의정 류성룡이 보낸 하인이 와서 고했다.

“영상 대감께서 영감을 모시고 오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이순신은 헝클어진 머릿결을 대충 매만지고 흰옷으로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류성룡의 집은 목멱산(남산) 아래 필동에 있었다.

필동과 이웃한 건천동(乾川洞)은 마른내골이라고 했는데 일 년 내내 거의 물이 말라 있었다. 이날은 종일 비가 내림으로써 실개천이 만들어졌고 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천변 언덕은 노란 개나리, 붉은 진달래, 하얀 벚꽃에 봄풀이 자라 파릇파릇했다.

이곳은 이순신이 나고 10대까지 살았던 고향이다. 어린 시절 추억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세 살 터울의 류성룡과 원균, 이렇게 셋이서 서당을 다니고 목멱산에서 전쟁놀이를 하며 뛰어놀았던 추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아! 운명의 장난인가. 세 사람은 호시절 이런 인연을 가지고 있었지만 커서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감으로써 악연을 쌓고 말았다.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에 빠져 어둑할 때 집에 돌아온 이순신은 공부를 등한시한다는 어머니의 걱정을 들으며 버드나무 회초리를 맞기도 했다.

“순신아, 너라도 과거에 붙어야 몰락한 우리 집안이 일어나지 않겠느냐.”

“아닙니다, 어머니. 남들은 역적의 자손이라 손가락질하는데 공부는 해서 뭐 해요. 흐흑.”

어머니의 따끔한 말에 이순신은 이렇게 대꾸하며 눈물을 흘렸다.

“아니, 누가 역적 자식이라 하더냐. 네 할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셔. 훗날 알게 될 것이니라.”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은 중종 때 신진 사림인 개혁파 정암(조광조)을 따르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 이정은 과거를 단념하고 청계천에 나가 세월을 낚고 있었으니 가세가 한미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이 10대 때 어머니의 고향인 아산으로 이사를 간 것도 먹고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야, 역적의 자식! 백수의 자식아! 겁쟁이처럼 어디로 도망치려는 것이냐?”

어린 원균은 길거리 한복판에 떡 버티고 서서 이사 가는 이순신을 놀려댔다.

류성룡이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성룡이 형아, 균이 형아도 나중에 어른 돼서 꼭 만나야 해. 알았지 응?”

몸체보다 더 큰 등짐을 진 이순신은 가족의 꽁무니를 따라 뒤뚱거리며 동작나루로 향했다.

비안개로 어둑한 목멱산의 마루금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이순신은 갑자기 한산도의 원균이 떠올라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아들 울과 함께 영상의 집 대문에 다다랐다. 대문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국태민안(國泰民安) 같은 입춘방이 붙어있었다. 봄을 맞이하여 경사스러움이 많아지고, 나라가 태평해서 백성이 편안해지기를 기원하는 문구였다.

서애 류성룡 대감이 대청마루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수년째 전란의 풍파를 겪은 탓인지 무척 수척해 보였다.

“오호, 여해, 어서 오시게나. 이게 얼마 만인가.”

이순신은 류성룡을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으흐흑, 서애 대감 이게 얼마만 입니까.”

“오호 여해, 그동안 일각이 여삼추였다네. 손이나 한번 잡아봄세. 이 젊은이는?”

“제 둘째 울이라 하옵니다. 저를 보살피고 있습니다.”

류성룡은 전란 중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고 왕명을 받아 3도 체찰사(군민 총괄 사령관)로서 수십만의 명군과 조선군의 식량, 그리고 수만 필의 마초를 대는데 허리가 휘어지도록 갖은 고생을 한 사람이다. 전쟁 중에 틈틈이 남쪽의 이순신에게 ‘기효신서’ 같은 병략서를 보내주었고 가끔씩 편지도 왕래했다.

무엇보다 능력에 비해 하찮고 낮은 보직을 전전하던 이순신을 당상관인 정3품 전라좌수사로 발탁한 것은 그의 지인지감(知人之鑑 사람의 진면목을 알아봄)과 입현무방(立賢無方 능력에 따라 인재를 씀)의 통찰력과 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류성룡은 청렴했다. 일본과 화해를 주장했다는 주화오국(主和誤國) 죄명으로 북인들의 탄핵을 받고 안동으로 내려왔을 때 변변한 집 한 채 없었다. 피와 눈물을 흘리며 ‘징비록’을 썼던 하회 부근 옥연정사는 아는 스님이 빌려준 집이었다.

조촐한 주안상이 차려졌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여해, 한 잔 괜찮겠지?”

바깥은 어둠을 뚫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늘어뜨린 대나무 발 사이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은 심각했다. 류성룡은 조정의 상황을 소상하게 이야기해주었다.

1597년 정유년 1월 일본의 재침이 가시화되자 국왕은 비변사(備邊司 군국 사무를 맡던 최고기구) 회의를 긴급 소집해서 대책을 논의했다. 지체 없이 전군에 계엄령을 내리고 청야(淸野)의 방책을 쓰며 명나라에 다시 원군을 청병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임진년엔 불시의 침범을 당해 청야책을 제대로 펴지 못했습니다. 이번엔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미리 식량을 짊어지고 산성으로 들어가게 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병기와 군량미도 여러 곳에 분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왜적들은 반드시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노릴 것이므로 그곳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해야 하겠습니다.”

청야는 적군이 현지에서 식량이나 무기, 집 등을 쓸 수 없도록 모두 불을 태워 빈 공간으로 만드는 초토화 작전이다.

영의정 류성룡이 이같이 똑 떨어지게 매듭을 짓듯 아뢰자 국왕은 느닷없이 손으로 방바닥을 땅! 땅! 땅! 치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또다시 전란이라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오! 복도 지지리도 없지…. 아아앙!”

“전하! 망극하나이다.”

신하들은 왕이 울음을 터뜨리자 어쩔 줄 몰라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엎드렸다. 수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서 논쟁이 붙었다. 서인인 예조판서 윤근수가 상소를 올렸다.

“원균은 이순신과의 불화로 말미암아 충청도 우병사(종2품 육군 무관)가 되었다가 전라도 좌병사로 옮겼습니다. 원균은 본디 해전에 능한 수군의 장수입니다. 그를 다시 경상우도 수사(정3품 수군지휘관)로 임명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사료됩니다. 임진년 해전에서 군공을 세운 장수들을 꼽아보면, 원균이 그중 강직하고 용맹하였습니다. 그래서 왜적들도 조선의 수군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균과 인척인 윤근수는 원균의 수사 재기용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전쟁 초기 연전연승을 이끌었던 이순신의 존재감을 억지로 감추었다. 자기편 사람을 두호하는 진영논리를 폈지만 국왕은 모르는 체 받아들였다.

“으음, 훌륭한 건의이므로 짐은 가납한다.”

이것은 앞으로 이순신의 수난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경들도 일전에 원균이 올린 장계를 알고 있을거요.”

국왕은 갑자기 보자기에 싼 두루마리를 풀고 환관을 통해 영의정 류성룡에게 전하게 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읽어보라고 했다.

“임진년 초기 적의 육군은 한 달 사이에 평양까지 침공하였으나 바다의 적은 패전을 거듭하고 남해 서쪽으로 오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방비는 오직 수군에 달려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수백 척의 수군이 가덕도 뒤로 진출하고 날쌘 선단(船團)을 부산포 절영도 근해까지 보내 크게 위세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신은 전에 바다를 방어한 일이 있기에 침묵을 지킬 수가 없어 감히 전하께 아뢰는 바입니다.”

마지못해 원균의 장계를 읽고 난 류성룡은 모멸감을 느끼면서 심정이 착잡해졌다. 원균의 말은 그럴듯했으나 과연 실행할 수 있을까 의아스러웠다. 또 은연중 이순신을 폄하하고 있는게 마음에 걸렸다.

“원균의 건의가 옳다고 보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국왕이 물었다.

“원균은 용감하고 훌륭한 수군장수입니다. 경상도를 담당하는 통제사로 승격시키는 게 좋을 듯합니다.”

판중추부사 윤두수가 답했다. 윤근수의 형인 윤두수는 서인의 두목이었다.

“일단 이순신에게 3도(전라, 경상, 충청) 수군을 통솔하게 한 이상 또 다른 통제사를 두어 수군을 쪼개는 것은 상책이 아니며 군령을 혼란스럽게 만들 염려가 있습니다.”

류성룡이 작심하고 직언했다.

이즈음 전 현감 박성은 ‘순신가참(舜臣可斬)!’, 이순신의 목을 마땅히 베어야 한다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조정은 이순신의 거취를 놓고 편이 완전히 갈렸다.

새벽닭이 울 무렵 류성룡의 집에서 나온 이순신은 왕벚꽃 나무 아래 주저앉아 눈물을 뿌렸다.

“울아, 아비가 여기서 좀 쉬었다 가도 되겠느냐.”

동쪽 하늘에 ‘정승별(제갈공명의 별)’이라 불리는 새벽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 떨어지지 않았음으로 이순신은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쉬었다. 천근만근으로 눈꺼풀이 감기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먹구름이 희미한 달빛마저 가렸으므로 사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우어엉!” “우어엉!” 암컷을 부르는 수컷 늑대의 울음은 처절했다. 목멱산에 비가 음산하게 내렸고 산 너머 남풍이 불어와 스산했다. 갑작스런 회오리 바람에 벚꽃송이가 날려 떨어졌다. 소름 끼치는 기이한 귀곡성이 어디에선가 들려왔다. 맞아 죽고 굶어 죽은 원귀의 한 서린 울음 같았다. 이순신은 목무덤에서 삐죽삐죽 튀어나온 탐관오리의 주검을 밟고 걸어갔다. 조각난 이무기는 꿈틀거리며 형체를 맞춰가고 있었다. 꽃잎을 더 움켜쥐기 위해 주검과 이무기가 엎치락뒤치락 아귀다툼을 벌이는 모습은 지옥도(地獄道)를 방불케 했다.

그때 허공의 달빛을 사선으로 가르며 날카로운 장검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저 멀리 서애 대감으로 보이는 사람이 쥔 칼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였도다.” 소리는 공간에서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아아악!” 이순신은 헛것을 본 것처럼 소스라치며 비명을 질렀다. 이마에 구슬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아버님, 아버님, 또 악몽을 꾸셨습니까?”

아들 울의 목소리는 애처롭게 들렸다.

김동철 : 교육학 박사,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 저서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외 다수
김동철 : 교육학 박사,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 저서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