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이순신의 항명-광화문으로 진격하라 ③

2021-04-12
김동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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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일을 공깃돌처럼 갖고 노는 암군(暗君)… 피가 끓어 올랐다

 

# 선조의 의심

백의종군 남행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인솔자 금오랑(의금부 도사) 이사빈 일행은 먼저 떠나 수원부에 도착했다. 이순신은 동작나루를 건너 과천을 지나 인덕원 느티나무 그늘에 말을 매어놓고 바위를 베개 삼아 누웠다.

가없는 하늘엔 흰 구름이 두둥실 떠서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음력 4월 따사로운 봄볕 아래 봄바람이 살랑여 상처 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다독여주었다. 저물녘 수원에 들어가서 한 병사의 집에서 잠을 잤다.

수원 부사 유영건이 나와서 만났다. 독성 아래에 이르니 판관(종5품) 조발이 술을 준비하여 장막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몹시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길을 떠나 평택의 옛길을 거쳐 냇가에서 말을 쉬게 했다. 오산 황천상 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는 내 짐이 무겁다며 말을 내어 실어 보내게 했다. 고마운 일이다. 수탄을 거쳐 평택현 이내은손(李內隱孫)의 집에 투숙했는데 주인이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 자는 방이 아주 좁은데 뜨겁게 불을 때서 땀에 흠뻑 젖었다. 또 보리밥을 해온 사람도 있었다. 이순신은 며칠 동안의 남행 일을 일기에 꼼꼼히 적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아산 집이 나올 것이다.’ 젊은 시절 북방(평안도, 함경도)의 여진족과 대치하고, 중년 이후 남해안의 왜군을 막느라 부인 방씨를 제대로 못 본 지가 7년이 넘었다. 큰아들 회, 막내 면과 어여쁜 딸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머니! 어머니!” 이순신은 어린아이처럼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러댔다. 어머니를 똑 닮은 구름 속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순신아, 에미다. 몸은 괜찮으냐.”

이순신은 7년 전 전라좌수사로 순천부(지금의 여수)에 부임한 뒤 여든을 바라보는 노모를 웅천 정대수 장군 집에 모셨다. 그런 어머니는 아들이 한산도에서 한성 의금부로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아연실색, 바닷길을 통해 고향인 아산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세월이 하 수선한 때였다. 내우외환! 나라 안팎으로 온갖 시련과 고난이 들이닥쳤다. 일본의 재침이 예고된 판에 조정은 ‘원균을 살리고, 이순신은 죽여야 한다’는 서인-북인-남인 간에 치열한 설전이 벌어졌고 국왕은 이순신이 역심(逆心)을 품고 있다는 의심을 놓지 않고 있었다.

1597년 정월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2차 침공의 명목을 조선에 뒤집어씌웠다.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 황신이 부산에서 올린 장계엔 일본 측의 선전포고가 들어있었다.

대륙과 해양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은 국가 사활이 걸린 생존전략에 매진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그저 명나라 천자(天子)에 기대어 안위를 보장받는 사대(事大)에 만족했고 스스로 자강하려는 노력은 등한시했다.

제왕학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망전필위(忘戰必危),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의 확립이다.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고 미리 준비하면 환란이 없을 것이라는 교훈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런데 조선 국왕과 대신들은 당리당략 입씨름에는 귀신이었지만, 나라와 백성에 관한 한 등신과 같았다. 하늘은 이렇게 직무를 내팽개친 조선에게 외침이나 민중 반란으로 준엄한 심판을 내리곤 했다. 그러나 민족 특유의 급망증으로 인해 그때뿐이었다.

춘사월 호시절이 왔건만, 이순신에게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으되 봄기운을 전혀 느낄 수 없어 암울했다.

“크하아!”

손발이 다 묶인 이순신은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선가 피골이 상접해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중늙은이가 다가왔다.

“댁은 뉘시요?”

“조~기 평택에 사는데 얘들이 배고프다고 징징대서….”

“그럼, 뭐 먹을 것 좀 찾았소?”

“마누라는 나무껍질, 산나물, 쑥을 캐고 저는 강에서 잉어, 붕어, 피라미를 잡는데…. 근데 노인은 왜 여기 있소?”

“나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요.”

“행색을 보아하니 그렇긴 한데, 말과 하인이 있으니 지체 높은 사람이 아니겠소?”

멀리서 그 가족들이 다가왔다.

“아부지, 빨랑 고기 잡아줘유! 배가 등가죽에 착 달라붙었당게유.”

열 살쯤 되는 어린아이들은 반들반들 검은 때가 탄 홑껍데기 잠뱅이를 걸치고 있었다.

“울아, 저 아이들에게 이거라도 갖다주어라.”

이순신은 괴나리봇짐에서 주섬주섬 삶은 감자 두 개를 꺼냈다. 아이들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후딱 먹어치웠다.

“피난 간 집 곡식을 탈탈 털어서 그런대로 호구책은 면했지만, 이젠 그마저도 동이 나서 이렇게 산과 강을 헤매며 죽지 못해 살고 있습죠.”

“조금 전 평택이라 했오? 거긴 원균 장군 고향이 아니오.”

“네. 근데 남쪽에서 이순신 장군과 불화를 겪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됐다던데요? 그 양반 성격이 워낙 고약해서 부하들이 어디 붙어있겠어요.”

“으음….”

“노인장,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쳐서 도망간 왕이 돌아왔다지유? 근데 왕이 이 장군을 잡아다가 고문으로 죽였다던데요.”

“그럴 리가 있겠소.”

“못 들었소? 아니 세상에 쫘악 퍼진 소문입니다요.”

“어무이! 배고파 죽겠다니께유! 빨랑빨랑 뭣 좀 줘유.”

“나도!”

아이들의 칭얼거림은 처량했는데 이순신에게는 천둥소리같이 들렸다.

“얘들아! 보채지 좀 말구 지둘러, 아부지가 언능 고기 잡아 올거야.”

“으이구 망할 놈의 세상! 그래도 임진년에는 휘황찬란한 투구를 쓴 일본 장수가 쌀, 보리, 좁쌀을 나눠줘서 멀건 죽이라도 끓여 먹었지만, 근데 우리 나라님은 어디를 가셨나. 코빼기도 보이질 않으니 허 참.”

이들과 가벼운 목례를 나누고 돌아서는 이순신 등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수하에 요시라(要時羅)라는 조선말에 능한 통사가 있었다. 그 위인은 민첩하고 영악하여 첩자 노릇을 제법 잘 해냈다. 요시라는 대마도주인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장인이자 상전인 고니시의 측근이었다.

고니시와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서로 앙숙인 것을 모르는 조선 사람은 없었다. 왜란 3년째 명과 일본은 강화를 시작했고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이때 요시라는 무시로 조선군 진영을 드나들며 수령들과 한데 어울리며 수작을 부렸다. 그는 관백(關伯 천황을 대신하는 국정 최고 운영자) 히데요시와 가토에 관한 내밀한 정보를 흘리고 다니며 환심을 샀다.

선조와 서인 세력은 ‘이중간첩’ 요시라에 대한 기대를 한껏 하고 있었다. 국왕은 급히 비변사의 회의를 소집했다.

“그 요시라라는 자의 탐보는 믿을만한 것인가?”

서인인 예조판서 윤근수가 재빨리 나섰다.

“고니시와 가토는 서로 죽이려고 하는 앙숙입니다. 요시라 말에 가토가 지금 대마도에 머물러 있다 하니, 이순신에게 명하시여 부산포 바깥 바다에 나가 매복해 있다가 가토를 사로잡거나 죽인다면 환난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황신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 이어 도원수 권율마저 요시라의 공훈을 참작하여 벼슬을 내려주기를 청하는 장계를 올렸다. 국왕은 권율의 건의에 따라 요시라에게 돈용교위(敦勇校尉)라는 정6품 무관직을 수여했다.

“요시라는 조선의 벼슬을 받고 감격하여 귀순할 뜻이 있는 겁니다. 항왜(降倭 항복한 왜군) 가운데 조선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터에 요시라를 공연히 의심할 까닭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서인인 좌의정 김응남의 말이었다. 남인으로 분류되는 온건파, 영의정 류성룡은 아무래도 왜적들의 반간책(反間策)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조정 안팎에서 환관도 상궁도 나인도 “요시라! 요시라! 우리 요시라!”를 외치며 어깨춤을 추고 다녔다.

“그렇다면 권율에게 밀지를 내려 이순신을 출동시켜 가토를 생포하도록 하오.”

국왕은 요시라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하며 이같이 전교했다. 1597년 정유년 1월 하순, 국왕의 명을 받은 권율과 황신은 득달같이 한산도로 달려갔다. 이순신은 류성룡의 편지를 통해 조정의 동정을 대강은 알고 있었다.

한겨울 바닷가, 먹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풍랑이 거센 추운 날씨였다. 통제사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과 함께 권율 일행을 운주당 온돌방으로 안내했다.

“우병사 김응서 보고에 따르면 가토가 이달 말쯤 부산포에 당도한다는 것이오.”

그러자 이순신이 반문했다.

“대감께선 요시라라는 자를 믿으십니까?”

“그야, 나도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아무리 고니시가 가토를 미워한다 할지라도 필경 한통속인 왜적들이 아닙니까. 왜군과 조선군 사이를 왕래하며 첩자 노릇이나 하고 있는 수상한 자의 세 치 혀를 믿고 경솔하게 군선을 출진시킬 수는 없습니다.”

만일 많은 병선을 이끌고 간다면 적에게 발각될 것이고 소수의 병선으로 간다면 적의 복병(伏兵)한테 당하기 십상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순신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국왕의 뜻을 어기고 있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무리 국왕의 명령이지만 적의 함정에 빠져 졸지에 수군을 패망시킬 수는 없었다.

또 뒷전에서 콩 놔라 팥 놔라 하는 조정 중신들의 요설도 마뜩찮았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가토는 이미 거제도 장문포에 도착해 있다가 울산 서생포 왜성으로 옮겨갔다. 국왕이 길게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순신에게 어찌 가토의 머리를 벨 것은 바랄 수 있겠는가. 그저 배를 띄워 시위나 하면서 돌아다닐 것이오.”

그러자 서인 두목 윤두수가 받았다.

“이순신이 조정의 명을 받지 않고 싸움에 나가기 싫어하는 통에 큰 계책을 성사시키지 못했습니다.”

“순신이란 대체 어떤 사람인가? 근래 들으니 대단히 간사한 사람이라 하오. 여기 영의정(류성룡)도 계시지만 이제 순신이 가토의 목을 바친다 하더라도 결코 속죄하지는 못할 것이오.”

이순신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 신세였다.

“순신은 같은 마을사람입니다. 신이 젊어서부터 알고 있는바 능히 자신의 직책을 감당할 만한 사람입니다.”

류성룡이 차분히 답했다.

“글은 잘하오?”

“문장과 시를 잘합니다. 다만 성격이 강직하고 남에게 굽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이 수사로 천거했던 것이며 임진년의 전공으로 정헌대부(정2품)까지 올랐는데 이것이 과했던 것 같습니다. 대개 장수란 바라는 대로 되면 마음이 흡족해지고 교만해지기 쉬운 법입니다.”

류성룡은 자칫 국왕의 역정을 돋우어 역효과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 본의 아니게 말했다.

“순신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교만하고 나태해진 것이다. 아마 지금쯤 전라도를 보전한 것이 자기 혼자의 힘이라고 자랑하고 있을 것이다.”

국왕의 이순신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는 항상 번득였다. 3년 전 거제 장문포 왜군을 치라는 왕명을 충실하게 거행하지 않은 것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이때 총지휘관은 체찰사 윤두수였다. 왜군이 전투를 피해 뚜렷한 전과(戰果)가 없자 이순신에게만 책임을 떠넘겼다.

국왕의 마음속엔 이미 원균이 자리잡고 있었다. 좌의정 김응남이 재빨리 눈치를 채고 아뢰었다.

“수군 장수로는 원균만 한 인물이 없습니다. 원균을 재등용해야 할 것입니다.”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균을 수군의 선봉으로 삼을까 하오.”

“지당한 말씀입니다.”

북인 거두 이산해가 나서며 장단을 맞추었다. 무신불립(無信不立), 왕과 신하 사이에 신의가 이미 사라졌으므로 둘 사이는 같이 갈 수 없게 됐다. 1594년 어느 봄날 명-일 강화협상기에 명 황제의 선유도사 담종인(譚宗仁)이 이순신 앞으로 ‘금토패문(禁討牌文)’을 불쑥 보내왔다.

“조선 수군은 왜군에 절대 가까이 가서는 안 되고, 시비도 걸지 말고, 또 수군을 모두 해산시켜 고향으로 돌려보내라.”

이 무슨 가당찮은 뚱딴지같은 소린가. 이순신은 즉각 반박문을 써서 담 도사에게 보냈다.

“이게 정말 황제의 명입니까? 불의한 세력을 토벌하는 게 무슨 죄가 됩니까?”

자칫 천자인 명 황제에 대한 도전으로 읽힐 수 있는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남쪽으로 가는 이순신의 머릿속에 온갖 상념이 떠올라 번뇌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느티나무 고목에 기대어 잠시 쉬던 이순신은 곤한 나머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것은 거룩한 분노였다. 나랏일을 공깃돌처럼 갖고 노는 암군(暗君), 당리당략으로 찧고 까부는 간신배들과 담종인의 어처구니없는 갑질에 대해 응징하려는 자세였다.

“그 누구도 천벌을 면치 못하리라!”

늙은 느티나무의 신통력을 받은 이순신은 허공으로 뛰어올라 두 자루의 칼을 번득이기 시작했다.

“이 무도한 자들을 모조리 벨 것이니라!”

휘잉! 휘잉!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명쾌했다.

종횡무진! 위로, 아래로, 앞으로, 뒤로, 꺾고, 옆으로 비틀고 회전하면서 용으로 승천하려던 잠룡들의 대가리를 싹둑싹둑 잘라버렸다. 땅엔 이무기 사체들이 즐비했다. 베어진 간신배들의 해골에서 독사들이 쑤욱쑤욱 튀어 나와 맹독을 뿜어댔다. 왕 독사가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이순신에게 날아왔다. 순간 예리한 칼날이 회전톱 돌 듯 위이잉! 소리를 내면서 독사의 모가지를 모두 작살냈다. 그 피가 이순신의 얼굴에 튀었다.

“아아악!”

곁에 있던 아들 울이 아버지를 끌어 앉고 울먹였다.

“아버님, 아버님. 이제 저 고개만 넘으면 우리 집입니다요.”

김동철 : 교육학 박사,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 저서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외 다수
김동철 : 교육학 박사,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 저서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