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이순신의 항명-광화문으로 진격하라 ④

2021-04-18
김동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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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남은 두 개의 화전(火箭)… 불화살은 역린을 명중했다

 

#천형의 가시밭길

아산 땅 저 멀리에 선산이 보였다.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춤에 어렴풋이 흔들렸다. 한성을 떠나 과천 수원 오산 평택을 거쳐 닷새 만에 아산 땅 둔포에 이르렀다. 오는 길에 “장군님을 모시고 대접하겠다”는 집들이 즐비했고, 말을 내어주는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둔포 어라산 기슭에 있는 선산은 언뜻 보아도 수목이 들불에 타고 말라비틀어져서 볼썽사나웠다. 이순신은 부친 정(貞)의 묘소 앞에 엎드려 곡을 올렸다. 다른 조상의 묘소 아래서 절하고 곡하느라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저녁때 어머니 초계 변씨 외가로 가서 사당에 절하고 그 길로 큰 조카 뇌의 집에 가서 조상의 사당에 엎드렸다. 장인, 장모의 신위 앞에 절하고 바로 작은 형님(요신)과 아우 여필(우신)의 부인인 제수의 사당에도 올라갔다.

아산 토호인 방진(方震)은 보성군수를 역임한 무관 출신으로 이순신에게 무인의 길을 열어준 사람이다. 이웃 동네 건실한 청년으로 소문난 이순신은 스물한 살 되던 해 방진의 무남독녀 외동딸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장인 방진은 이순신에게 무과시험 공부를 권했다.

“자네 집안일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무과 준비에 매진하도록 하게. 자네 같이 완력이 세고 정신력이 강하다면 능히 가능한 일일 것이야. 아암.”

방진의 데릴사위가 된 이순신은 문과의 사서삼경은 물론 무과의 무경칠서(武經七書)를 달달 욀 정도로 학업에 힘썼다. 또 당대의 명궁(名弓)인 장인으로부터 활쏘기 훈련을 단단히 받았다. 말을 타고 화살을 쏘는 기사(騎射) 훈련은 방화산 자락을 오르내리며 이루어졌다.

본가에 들어선 이순신은 부인 방씨와 상면했다. 실로 7년 만의 일이었다.

“여보!”

부인 방씨는 초라한 몰골의 지아비를 보자마자 고개를 돌려 흐느꼈다.

이순신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삼켰다.

“여보, 그간 아이들하고 집을 지키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정말 미안하구려.”

부인 방씨는 지아비에게 다가와 다소곳이 얼굴을 묻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큰아들 회, 막내 면, 딸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안아드렸다.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모여 집안은 시끌벅적했다. 역참 일을 보는 홍 찰방과 이 별좌(종5품)가 흥에 겨워 창(唱) 두어 가락을 뽑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혀 흥겹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각기 술병을 가져와 먼 길을 가는 이순신을 위로하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몹시 취했다. 모임은 늦게 파했다. 마침 금부도사 이사빈이 아산현에서 왔기에 어머니 친척인 변흥백의 집에서 극진히 모셨다.

이날 밤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장인이 나타났고 방화산 치마장(馳馬場)이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났다. 장인과 함께 말을 달리면서 화살을 쏘던 기사(騎射) 훈련장이었다. 그 아래 활터는 여전했다. 커다란 은행나무 암수 두 그루가 반기는 듯 움직였다. 활터에는 호랑이, 용 문양의 과녁이 붙어있었다. 임금이 계신 북쪽을 피해 남쪽에 설치된 과녁이었다. 어금니를 앙다문 이순신은 활시위를 잡은 깍짓손을 높이 쳐들고 힘껏 잡아당겼다.

피용! 시위를 떠난 철전(鐵箭 무쇠살)이 순식간에 ‘백수의 왕’인 호랑이 과녁 정중앙에 팍 꽂혔다. 두 번째 화살은 호랑이 눈을 콕 찔렀다. 이렇게 십여 대의 화살이 날아가 호랑이 면상은 갈가리 찢어졌다.

순간 얼굴에 피범벅을 한 사람이 혼백처럼 얼핏 스쳐 지나갔다. 이순신은 모두 5순의 화살을 쏘았다. 1순이 5대이니 25발을 쏜 것이다. 마지막 남은 두 개의 화살은 화전(火箭 불화살)이었다. 하나가 용의 목 아래 한 자쯤 되는 역린(逆鱗)을 향했다. 자고로 역린을 건드린 사람치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활시위를 떠난 불화살은 공기에 부딪혀 씨잉~ 울면서 역린을 정확히 맞혀 떨어뜨렸다. 용은 괴로운 듯 후하황 괴성을 지르며 큰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검붉은 화염과 푸르른 맹독을 뿜으며 이순신을 향해 곧장 슈~웅 날아왔다.

그때 장인이 마지막 불화살로 용의 눈을 겨냥해 정곡을 찔렀다. 화염에 휩싸인 용은 길길이 날뛰며 크르렁 크르렁 용트림을 쏟아냈다. 그 소리가 하도 커서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았다. 몸통을 비꼬며 요동치던 용은 마침내 마른하늘에 천둥 번개를 불러왔다. 우르릉~ 꽈꽝! 수많은 역린 조각들이 날아올라 하늘의 해를 가렸다. 어두컴컴한 하늘에 요란한 천둥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용은 번갯불에 튀겨져 추락하자마자 산산조각 숯검댕이로 쪼개졌다.

아아악! 이순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곁에 누워있던 방씨 부인이 땀에 흠뻑 젖은 지아비의 몸을 보듬었다. 지어미가 호롱불을 켜고 머리맡 자리끼를 건네자 이순신은 단숨에 들이켰다. 식은땀을 흘리던 이순신은 정신이 혼미한 듯 스르륵 무너졌다. 지어미는 지아비의 젖은 속옷을 하나씩 벗겨서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이순신은 지어미의 품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호롱불이 꺼졌다. 장독대 옆 봉곳이 솟은 백합 봉오리가 살며시 터졌다.

새벽닭이 울 무렵 비몽사몽 간에 흰옷을 입은 어머니가 나타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참으로 기이한 꿈이었다. 용의 눈, 불화살, 피범벅, 소복 입은 어머니의 눈물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백 년을 다 살아도 삼만육천 일, 우리네 삶이란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과도 같은 것인가.’ 이른 아침 이순신은 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아득히 꿈결 같은 지난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이튿날 안흥에 보냈던 종이 돌아와 모친 일행이 선편으로 무사히 도착했다는 기별을 전했다. 그렇다면 오늘내일 사이 인주의 해암(蟹巖 게바위) 나루에 도착할 것이다.

이순신이 어느 일가 댁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어머니를 모시는 종 순화가 헐레벌떡 달려와 발밑에 쓰러지며 통곡을 했다.

“영감마님, 영감마님, 으흐흑. 노마님께서, 노마님께서…. 흐흐흑.”

이순신은 직감적으로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어머님이? 무슨 변고라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이순신은 혼이 나간 듯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나루터로 말을 달렸다. 시신은 선실에 정중히 모셔져 있었다. 향년 83세. 어머니 변씨 부인은 아들의 하옥 소식을 듣고 노환을 무릎 쓰고 여수에서 올라오던 길이었다. 충청도 해안에서 큰 풍랑을 만나 배멀미에 시달린 끝에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운명한 것이다.

1597년 정유년 4월 13일 맑음.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경황이 없는 속에서 홍 찰방과 이 별좌가 관을 만들었고 오종수는 입관을 도왔다. 전경복은 밤새 상복을 만들었다. 이순신은 남의 상사(喪事)를 자신의 일처럼 맡아 처리해준 사람들에게 뼈가 가루가 되도록 잊지 못할 고마움을 느꼈다.

지체하지 말고 도원수 권율의 군영으로 종군하라는 왕명이 하도 지엄하여 격식과 절차를 갖추어 장사를 지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서둘러 선산으로 운구하여 하관했다.

“어머님, 이제 돌아가시는 것입니까.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어머니임. 으흐흑.”

이순신은 어머니 봉분에 엎드려 엉엉엉 대성통곡을 했다. 그저 어서 빨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순신은 1576년 32세 나이로 무과급제 후 22년 동안 북로남왜(北虜南倭), 북방 여진 오랑캐와 남방 왜구를 방비하느라 변방을 떠돌았다. 그런 이순신은 가족과 일가친척을 끔찍이 아꼈다.

1589년 인사권을 가진 이조판서가 된 류성룡이 이순신을 정읍 현감(종6품)으로 발령을 냈다. 과거 급제 후 13년 만에 현감이 된 이순신은 평소 마음의 빚을 갚기로 마음먹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두 형 희신과 요신의 아들인 조카들 일이었다. 어머니 초계 변씨와 두 형수 및 조카와 아들, 종 등 모두 합쳐서 24명의 가솔(家率)을 데리고 임지로 내려갔다. 그러자 너무 많은 식솔을 데려간다며 ‘남솔(濫率)’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내가 차라리 남솔의 죄를 지을지언정 이 의지할 데 없는 어린 것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이순신은 눈물을 흘렸다.

가엾은 사람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나중에 애민 정신으로 발휘되었다. 이순신은 아버지와 두 형이 모두 일찍 세상을 뜸으로써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홀어머니는 그런 이순신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부친 이정은 비록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유학에 조예가 깊어 세 아들의 이름 자를 중국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차용해 지었다.

큰아들 희신(羲臣)은 ‘목축의 신’ 복희씨(伏羲氏)의 신하요, 둘째 요신(堯臣)은 태평시대를 연 요(堯) 임금의 신하이고, 셋째 순신(舜臣)은 효자로 이름난 순(舜) 임금의 신하였으며, 막내 우신(禹臣)은 치수를 잘 다스린 우임금의 신하가 됐다.

이름은 사람을 만든다. 효행으로 유명했던 순 임금과 마찬가지로 이순신도 유별난 효자였다.

“이순신은 두 형의 어린 자녀들을 자기 친자식같이 어루만져 길렀다. 출가시키고 장가보내는 일도 반드시 조카들이 먼저 하게 해주고 친자녀는 나중에 하게 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순신은 큰형 희신의 아들(뇌, 분, 번, 완)과 둘째 형 요신의 아들(봉, 해)을 친아들 회, 열, 면보다 먼저 장가를 보낸 것이다. 모두 홀어머니를 향한 효심(孝心)일 터이다. 이순신은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을 난중일기에 백여 차례 절절하게 술회했다.

1592년 임진년 정월 초하루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우신)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얘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한을 이길 수 없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첫날에 이순신은 팔순을 바라보는 노모부터 걱정했다.

1592년 임진년 5월 4일은 어머니 생일이었다.

“오늘이 어머니 생신날인데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찾아뵙고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될 것이다. 홀로 멀리 바다에 앉았으니 가슴에 품은 생각을 어찌 말로 다하랴.”

어머니의 생일날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군관 송희립, 광양현감 어영담, 녹도만호 정운,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장군과 동명이인), 흥양현감 배흥립 등 제장들과 함께 옥포의 왜적을 토벌하기 위해 1차 출정하는 날이었다. 마침 그날은 일본군 15만 대군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해 한성에 무혈입성한 즈음이다. 국왕은 이미 임진강을 건너 북행 중이었다.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을 옮기기 전인 1593년 5월 일흔아홉 살 노모를 전라좌수영 가까운 여수 고음천 정대수 장군의 집으로 모셔왔다.

1594년 갑오년 1월 11일 흐리나 비가 오지 않음.

“아침에 어머님을 뵈려고 배를 타고 바람을 따라 고음천에 도착했다. 남의길, 윤사행, 조카 분과 함께 갔다. 어머님께 배알하려 하니 어머님은 주무시고 계셨다. 큰 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 일어나셨다. 숨을 가쁘게 쉬시어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하여 감춰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말씀을 하시는 데는 착오가 없으셨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다음날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라고 분부하여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심정으로 탄식을 하지 않으셨다.”

대설국욕(大雪國辱)! 어머니는 아들에게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는 충(忠)을 이야기했고 아들은 효(孝)로써 어머니를 극진하게 대했다. 효는 만행(萬行)의 근본이다. 장군의 효심은 곧 충심으로 이어졌다. ‘효자 가문에서 충신 난다’는 말 그대로였다.

1595년 을미년 1월 1일 맑음.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았다.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또 편찮은 팔순 어머니를 걱정하며 밤을 새웠다.”

오매불망(寤寐不忘), 자나 깨나 어머니를 잊지 못하던 이순신은 1596년 10월 7일 어머니를 위로해줄 좋은 기회를 맞았다. 82세 된 노모를 위한 수연 잔치를 여수 본영에서 차려드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효도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듬해 2월 이순신은 왕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한산도에서 한성 의금부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1597년 정유년 4월 19일, 이순신은 붓을 들어 한 글자씩 적어나갔다. 굵은 눈물방울이 자신도 모르게 뚝뚝 떨어지는 바람에 한지는 이내 검은 먹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일찍 나와서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곡하였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 앞에 하직을 아뢰었다.”

천륜을 가르는 고통은 이처럼 아리고 쓰렸다.

이틀 전 의금부 서리 이수영이 공주에서 와서 남행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차마 어머니의 영전을 떠나지 못하다가 19일 그를 따라나섰다. 당시 부모상을 당하면 3년간 산소 옆에 움막을 짓고 시묘(侍墓)살이하는 게 관례였다.

이순신의 백의종군 천리길은 회한과 눈물로 뒤범벅이 된 천형(天刑)의 가시밭길이었다. 오호 통재라! 이순신에게 정유년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김동철 : 교육학 박사,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 저서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외 다수
김동철 : 교육학 박사,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 저서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