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이순신의 항명-광화문으로 진격하라 ⑦

2021-05-10
김동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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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경험 못 한 참상… 人事로 인해 亡事가 됐구나

 

#원균의 추문(醜聞)

구름 따라 바람 따라 흘러온 여정을 떠올리니 도성에서 꽤 멀리 와있었다. 저 멀리 지리산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앞으로 섬진강이 흐르니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이었다. 섬진강을 따라 늘어선 매화나무의 매실은 알알이 탐스럽게 열렸다. 햇볕은 따가웠지만 강바람이 간간이 불어와 땀을 식혀주었다.

‘자연은 저렇게 무상하게 변해가건만 이 내 몸은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순신은 개천가 느티나무에 말을 매어놓고 잠시 쉬었다. 휘늘어진 수양버들 가지는 솔바람에 흔들려 제법 운치가 있었다. 개천엔 오리 떼와 백로, 검은 민물가마우지가 유영을 즐기고 왜가리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남녘 들에는 그런대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 모습이 보여 적이 안심이 됐다. 망중한을 즐기던 이순신은 불쑥 무슨 생각이 났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초심은 아직도 남아있는가.’

“장부로 태어나 세상에 쓰이면 최선을 다할 것이며, 쓰이지 않는다면 농사짓는 것으로 충분하다. 권세와 부귀에 아첨하여 한때 이를 도둑질하여 일시적으로 영화를 누리는 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1576년 서른두 살 무과에 급제한 뒤 아산 생가에서 초임발령을 기다리면서 쓴 글이다. 이순신은 자신의 공직관을 담은 이 글을 조용히 읊조렸다.

무릇 세상일을 생각하건대 인사(人事)가 만사(萬事)였다. 이순신은 몇 해 동안 한산도에서 군영을 운영하고 목숨을 건 전투를 수차례 치르면서 얻은 결론 중 가장 중한 것은 사람이 답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순신의 은원(恩怨 은혜와 원수)으로 볼 때 류성룡은 위대한 만남이었고 원균은 상극(相剋)이었다. 사람들은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를 앙숙이라고 불렀다.

원균의 경우 사람 하나 잘못 뽑으면 그 결과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참상으로 끝난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원균은 칠천량 패전으로 조선 수군을 궤멸시켜 나라를 결딴냈다. 그래서 후세에 반면교사로 이름을 날렸고 그 행적은 고스란히 흑역사에 기록되었다.

국왕은 사람을 잘못 뽑아 국가 자살행위를 자초한 것이다. 그러고도 일언반구 반성은 없었다. 자고로 의심스러운 자는 쓰지 말라는 의인물용(疑人勿用)과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는 용인물의(用人勿疑)는 용인술의 대원칙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급에 이순신, 권율, 원균이 들어있는데, 패전지장인 원균이 23전 23승 불멸의 기록을 이룩한 이순신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국왕은 자신의 인사실패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논공행상을 자행했다.

원균은 당파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문제가 많은 위인이었다. 우선 능력에 비해 과분한 직책을 받다 보니 군영 운영과 통솔의 문제가 발생했다. 부하들을 다루는 데서 무리수를 두어 이탈자가 많이 발생했다. 또 전략을 짜내는 지략이 부족했는데 이것은 장수로서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결과적으로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에게 충성한 꼴이 되고 말았다.

“좋아~ 좋아~ 아주 좋아! 조선왕이란 자가 이순신을 내치고 원균을 택하더니만 꼴좋게 끝났구나. 빠가야로! 으하하하.” 바카야로(馬鹿野郞)는 ‘바보같은 자식’이라는 경멸어였다.

히데요시는 신이 난 원숭이처럼 어깨춤을 으쓱으쓱 추었다. 히데요시는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로부터 사루(猿 원숭이)라는 별명을 받은 바 있었다.

“와키자카, 도도, 가토! 너희들은 이제 주인이 없는 조선의 바다 제해권을 틀어줘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서해로 진출해서 한강으로 진격한 뒤 조선 국왕을 내 앞으로 잡아 오란 말이다. 알겠느냐? 으하하하.”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포호빙하(暴虎馮河)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배도 없이 황하를 건넌다는 뜻이다. 만용과 무모함은 원균의 일생을 관통했다. 게다가 인품 또한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실속은 없으면서 허세만 부렸고 안하무인(眼下無人)의 자세는 방자하고 교만하여 남을 업신여겼다. 손자병법의 부지피부지기(不知彼不知己) 매전필패(每戰必敗)! 상대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도 모르니,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 그자는 하도 겁이 많아서 한번 나아가 싸우려면 여간 복잡한 게 아니란 말이야. 날씨니 조류니 적의 사정이니, 이것저것 따질 게 많아서 영 피곤해. 아암.”

원균은 치밀한 이순신을 ‘굼벵이’ ‘겁쟁이’라며 폄훼하기 일쑤였다.

국왕은 자신보다 인기가 쑥쑥 올라가는 이순신을 도저히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질시는 시기하는 마음을 넘어서 질투(嫉妬)에 가까웠다.

‘하늘에 해가 두 개가 아니듯 감히 내게 도전하는 자, 어림없도다! 당장 그 싹을 싹둑 잘라버릴 수밖에.’

열패감에 사로잡힌 국왕은 불면의 밤을 보내기 일쑤였다.

‘이순신이 한산도의 잘 훈련된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올라온다면? 과연 누가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국왕은 곧잘 이런 공상에 사로잡혔고 그것은 망상이 되어 악몽으로 자주 나타났다.

“이순신! 무서워, 무섭단 말이야! 뭣들하느냐, 그자를 당장 잡아 참수하라!”

국왕은 가위에 눌려 이 같은 비명을 지르곤 했다. 또 사리분별력마저 부족했음으로 변덕스러웠다. 신하들은 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했지만 마음 속에는 언제든지 배반하려는 뜻을 꽁꽁 숨겼다.

이순신을 둘러싼 조정 논의는 1597년 정유년 정초를 전후해서 일곱 차례나 되풀이 되었다. 마침내 사헌부에서 이순신을 잡아들여 국문하여 치죄(治罪)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를 본 국왕은 승지를 불러 한산도의 이순신을 잡아 올리는 방법까지 지시했다.

“선전관에게 밀부(密符 군사동원 명령서)를 전하게 하라. 이것은 원균으로 교체한 연후에 거행해야 할 것이다.” 선전관(宣傳官)은 왕명을 전하는 무관이다.

덜 익은 매실을 입에 문 이순신은 언덕배기에 비스듬히 누워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몇 달 전 한산도 치욕이 떠올라 몸서리쳤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국왕에게 하례를 올린 뒤 의기양양하게 막료들을 거느리고 도성을 떠났다. 이 소식이 한산도에 전해지자 본영은 발칵 뒤집혔다. 도처의 군막에서 절규와 통곡이 터져 나왔다. 삽시간에 운주당 뜰 안은 군사와 백성들로 가득 찼다. 잘못 건드리면 곧바로 터질 기세였다.

“통제사 영감! 이 어찌 된 일입니까요. 세상 대명천지에 이런 부당한 일은 없습니다요. 흐흑.”

모두들 땅바닥에 엎드려 이순신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평복으로 대청에 모습을 드러낸 이순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후임으로 원균 장군이 오실 것이오. 여러분의 심정은 잘 알고 있소. 허나 어서 해산하고 자기 맡은 일을 계속하시오.”

곁에는 조카 분과 중위장 권준과 후부장 배흥립 등 핵심 막료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분노를 참느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산섬은 연일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줄초상을 만난 듯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원균의 행차가 들이닥쳤다. 원균은 판옥선을 타고 통제사 군령 깃발을 펄럭이며 위세 좋게 선창에 당도했다. 배다리까지 마중 나간 이순신은 담담한 심정으로 원균과 인사를 나누었다.

“먼 길에 수고가 많으셨소. 승진을 축하합니다.”

“아, 이거 얼마 만이오! 소식을 들으셨겠지만 내 마음도 편치가 못합니다그려. 하하.”

두 사람은 운주당에서 마주 앉았다. 이순신이 군량미 9914섬, 화약 4000근, 총통 300자루(병선의 장비 제외) 등 물품 재고 서류를 내놓자, 원균은 거들떠보려고 하지 않고 딴청을 피웠다.

“아아, 그깟 껏! 수하의 종사관이 나중에 챙길 것이오. 매사 꼼꼼하신 사또께서 작성하셨으니 어련하겠소이까? 히히히.”

원균은 누런 이빨을 드러낸 채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새 융복(戎服 무관 복장)으로 호사스럽게 치장한 원균은 통제사 군장(軍葬)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이순신을 맘껏 희롱하고 있었다.

“아아, 이걸 어쩌나. 임금을 속이고, 나아가 싸우지 않았다. 그러니 대역죄를 면할 방도가 없겠지요. 아니 그렇소이까. 전임 통제사 영감! 으흐흐흐.”

원균은 이순신에게 ‘전임’을 유난히 강조하면서 모욕을 주었다. 처지가 뒤바뀐 것을 눈앞에서 확인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럼 이만, 무운을 빕니다.”

이순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때 원균은 다시 앉기를 강청했다.

“아 아 아, 뭐 그리 빨리 가려고 그러시오. 가봐야 퀴퀴하고 답답한 감옥일 텐데…. 여기 너른 한산도 바다나 실컷 봐두시오. 으하하하.”

이순신은 두 주먹을 불끈쥐었다 천천히 풀었다. 곧이어 선전관 김식이 의금부 도사와 나졸들을 이끌고 한산도에 당도했다.

“통제사 영감!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왜 순순히 오라를 받습니까요. 흐흑흑.”

붉고 굵은 오랏줄에 두 손이 묶인 이순신을 바라보던 성난 수군들은 아연실색한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냥 이 길로 치고 올라가서 확 쓸어버립시다요.”

군중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에 이순신은 그쪽을 쳐다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성난 군사들과 백성들이 씩씩거리며 선창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순신은 잠시 거북선과 판옥선 등 군선들을 바라보았다.

“통제사 영감 천세!” “만세!” “만만세!”

길 양편에 도열한 장졸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리자, 이순신은 목례로 엄숙히 작별을 고했다. 조카 분이 뒤따랐다.

“여봐라!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로다! 어제의 음지가 오늘의 양지가 되었으니 이 아니 기쁠 소냐. 어서 풍악을 울려라! 으하하하. 으하하하.”

원균은 운주당 안에서 두 팔을 벌려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박장대소했다. 이 소리가 이순신 뒤편에서 울려 퍼졌다. 여수에서 한산도로 진을 옮긴 지 3년 7개월, 이순신의 나이 어언 쉰셋이었다.

남녘 땅에 발을 디디면서 원균에 관한 추문(醜聞)이 잇달아 들려왔다. 지난날 휘하 장졸과 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원균의 비행과 패악질을 말했다.

구례 현감 이원춘과 정사준이 와서 원균의 패악하고 망령된 행태를 고했다. 정원명도, 서산군수 안괄도 원균의 비행에 핏대를 세웠다. 진흥국이 여수 좌수영에서 와서 눈물을 흘리며 원균의 패악질을 성토했다.

전라병사 이복남 또한 원균의 추문에 대해 입에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쏟아냈다. 충청 우후 원유남은 한산도에서 와서 원균의 흉포함을 지적하면서 “진중의 장졸들이 이탈하여 반역하니 장차 어찌 될지 모르겠다”고 탄식했다.

이와같이 원균의 세평(世評)은 매우 좋지 못했다. 특히 한산도에서 막 돌아온 이경신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원균이 하급관리를 곡식을 교역한다는 구실을 삼아 육지에 보내놓고 그 아내를 사통하려 했는데, 그 여인이 발악하여 따르지 않고 밖으로 나와 고함을 꽥! 꽥! 질렀다고 합니다.”

이순신은 너무 기가 막혀 한숨을 푹 쉬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원균은 좋아하는 첩을 데려다가 그 집(운주당)에서 살며, 이중으로 울타리를 하여 안팎을 막아 놓아서 여러 장수들도 그의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술주정과 성내는 것을 일삼았고, 형벌에 법도가 없었으므로 군중에서 수군거리기를, ‘만일 왜적을 만난다면 오직 도망가는 수가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원균 몰래 그의 비행을 비웃었고, 또한 품의(稟議 윗사람과 의논함)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므로 호령(號令)이 행해지지 않았다. 부하들의 신망을 얻지 못한 원균은 현장 지휘관으로서 이미 체통을 잃어버린 꼴이 되었다.

1597년 정유년 5월 8일 맑음.

“원균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인가. 뇌물 짐이 한성으로 가는 길을 연잇고 있다.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잘못 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영내 엄정한 군기유지와 휘하 장졸들에 대한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원칙대로 행한 이순신의 한산도는 정리정돈이 잘 된 ‘준비된 군영’이었다.

“허허 참, 운주당에 첩을 데려와 주지육림으로 흥청망청했다니!”

이순신은 몇 년 전 원균의 일그러진 모습을 떠올렸다.

1594년 6월 초4일 맑음.

“저녁에 겸사복(兼司僕 임금의 호위무사)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그 글 가운데 ‘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의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1597년 정유년 7월 14일 꿈 이야기를 적어놓았다.

“새벽꿈에 내가 이원익 대감과 함께 어느 한 곳에 이르니 송장들이 널려 있어 혹은 밟고 혹은 목을 베기도 했다.”

불길한 예감이 든 이순신은 척자점을 쳐보았다. 그러나 적당한 괘를 찾을 수 없었다. 꼭 이틀 뒤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궤멸하고 말았다. 이것은 분명히 패전을 예고하는 현몽이었을 것이다.

김동철 : 교육학 박사,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 저서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외 다수
김동철 : 교육학 박사,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 저서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