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 승진 없어지자… 재판 ‘세월아 네월아

2021-05-22
최사무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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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법조계에선 법원 재판이 지나치게 더디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대법원 통계로도 확인되는데요. 전국적으로 1분기에 선고된 형사 합의부 1심 사건의 경우, 평균 처리 기간을 따져 보니 2017년 162.5일에서 올해는 215.3일로 52.8일 늘었습니다. 처리 기간이 32.4%나 늘었는데 그사이 사건 수는 10.5% 증가했을 뿐입니다.

민사 합의부에서 맡은 1심 사건도 4년 전에 비해 처리 기간이 43.6일(15%)이나 늘었는데요. 사건 수는 4.8% 줄었는데 처리 기간은 오히려 15% 늘어난 것입니다. 한 변호사는 “예전엔 민사 단독 재판부 사건은 소장을 법원에 넣고 나서 2개월쯤 뒤면 첫 재판을 받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4~6개월 정도 걸린다”고 했습니다.

재판·선고 날짜는 판사가 결정 합니다. 과거엔 월·주 단위 ‘적정 선고 건수’가 암묵적으로 존재했고, 법원장이나 그 밑의 수석부장판사가 이를 챙겼는데요. 그런데 2018년 ‘양승태 대법원’의 권한 남용 사건이 터진 이후 일선 재판부에 대한 ‘권고’ ‘감독’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한 법원장은 “개별 판사에게 사건 처리를 빨리 해달라고 얘기하는 순간 재판 개입, 직권남용이란 얘기가 나오니 요새는 아예 터치를 안 한다”고 했습니다.

재판이 오래걸리는 이유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2017년 취임하면서 고법부장 승진제 폐지 방침을 밝히고 올 2월부터 이를 시행하면서 법원엔 ‘승진’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법원장도 과거처럼 고법부장 중에서 올라가는 게 아니라, 각 법원의 판사들이 추천한 사람들 중에 임명하는 ‘법원장 추천제’가 확대되고 있는데요. 굳이 고법부장으로 있으면서 성과를 낼 필요가 없어진 겁니다. 이에 한 30대 판사는 “이젠 승진도 없고 또 요직에 가려면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이어야 한다는 말까지 돈다”며 “굳이 몸 상해가며 일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여기에 ‘워라밸(일과 개인 삶의 균형)’ 분위기가 법원 내에서 급속히 퍼지는 상황도 맞물렸는데요. 한 지방법원에선 재판 중이던 배석판사 중 하나가 “오후 6시가 되면 칼퇴근 하겠다”고 해 다른 재판부의 배석 판사를 ‘대타'로 법정 앞에 대기시켰던 일도 있었습니다. 
2019년 서울중앙지법에선 평판사들이 부장판사들에게 ‘한 달에 합의부 사건은 2~3건만 선고’ ‘배석판사가 쓴 판결문 수정은 한 번만 할 것’ ‘배석판사와의 합의(논의)는 일주일에 두 번만 할 것’이라는 요구 사항을 전달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작년 코로나 사태 이후엔 판사와 법원 직원들이 주 1회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 재판이 더 지연되고 있습니다. 재택근무 땐 재판부 판사들과 연락이 되지 않아 지난달 서울지방변호사회가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변호사들은 “재판받는 사람 입장에서 재판 기간이 길어진다는 건 ‘고통의 기간’이 그만큼 길어지는 것”이라며 “피해자는 결국 국민”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