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이순신의 항명-광화문으로 진격하라 ⑯

2021-07-14
김동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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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버린 국왕은 원수일 뿐… 택군은 그저 꿈인가

#민심의 이반

 

백성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은 무엇일까. 공자는 시경에서 현실의 부조리를 기술한 후 있어야 할 당위, 곧 왕이 백성을 골고루 사랑하고 주인으로 여기는 정치와 세상을 말하고 있다.

편을 가르지 않고 귀천을 막론하고 생명이 있는 소우주인 사람에 대한 애민을 강조했다. 이순신이 7년 전쟁 내내 조정의 원조 없이 군영에서 자급자족 생산을 통해 군졸과 피난민에게 애민을 실천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공자는 또 “지극히 천하고 어디에도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이 바로 백성이요, 높고 무겁기가 산과 같은 것도 또한 백성이다”라고 했다. 이 사상은 ‘성악설’을 주창했던 순자의 군주민수(君舟民水)와 맥이 닿아 있다. ‘군왕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거센 물결이 되어 배를 뒤집어엎기도 한다. 언뜻 무지렁이로 보이는 백성은 때론 하늘 같은 절대군주도 하루아침에 갈아치울 수 있을 만큼 파괴적 괴력을 가졌다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절대 왕조시대에서 백성이 택군(擇君 왕을 고름)이란 말을 감히 입 밖에 꺼낸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래서 불평불만을 안으로 곱씹다가 의병이 봉기할 때 그 떼거리에 묻어서 칼과 창, 낫이나 곡괭이를 들고 나서기도 했다.

성리학적 유교사상이 지배하는 사대부 사회에서 한자를 독점한 양반 계층은 문맹인 백성들을 가지고 놀기에 딱 좋았다. 글씨를 모르는 무식쟁이인 만큼, “어허! 너희들은 몰라도 된다. 그저 시키는 대로만 잘하면 되느니라”하면서 권력을 독점했다.

세상은 불평등했다. 무엇보다 목구멍에 풀칠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가운데 딸린 식솔을 먹여 살리는 일이 가장 급했다. 1594년 갑오년은 흉작으로 기근(饑饉)이 심했고 전염병의 창궐이 기세를 올렸다. 곡물이 귀한 나머지 소 한 마리 값이 쌀 3말에 불과했고 고급 무명베 한 필이 쌀 서너 되밖에 안 될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인상식(人相食)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급기야 사헌부에서는 국왕에게 식인(食人)의 풍조를 단속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한성을 비롯해 전국의 백성들 십중팔구는 기아와 전염병으로 죽어갔다.

“아, 글쎄 사람고기를 먹는다는데, 생지옥이 따로 있다던가.”

“호랑이에게 잡혀먹었다는 소릴 들은 적은 있어도, 식인이라.”

“오죽하면 인(人)고기를 먹겠나. 창자가 등짝에 착 들러붙었으니 도리가 없었겠지 뭐.”

“산 입에 거미줄 치지는 못하는 법. 츠츳.”

국왕이 도성으로 돌아온 뒤 장정에게 좁쌀 두되, 아녀자는 한 되를 배급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어림없어 간에 기별도 안 갔다.

굶주린 백성들은 호시탐탐 새로운 세상이 나타나 주기를 갈망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 한다고 했지만 국왕이 평시에 애민 정책을 폈더라면 백성의 고단함은 한결 더 나았을 것이었다.

여하튼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반역의 씨앗이 뿌려져 그 싹이 서서히 발아하기 시작했다. 남별궁은 1593년 계사년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주둔한 이래 중국 사신이 머무르는 곳이다. 사신을 위한 연회가 베풀어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주변에는 어린애들이 옹기종기 모여 주린 배를 움켜잡고 코를 킁킁거렸다. 술에 취해 배 터지도록 먹은 사신이 뱉은 토사물이라도 있다면, 그것이라도 핥아먹으려는 심산이었다.

무릇 백성이란 무엇인가. 민심무상(民心無常)! 백성들은 일정함이 없어 절대로 어느 한 곳에 붙박이로 붙어있지 않는다. 백성들의 마음은 유혜지회(惟惠之懷)해서 오로지 은혜롭게 정치하고 혜택을 베푸는 정책을 펴내는 사람에게로 향한다. 그가 어느 민족이든, 그가 어느 나라 누구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왜란 바로 전 정여립이 모사한 난은 사대부가 왕위를 넘보는 택군(擇君)의 역성혁명이었다. 선조의 실덕(失德)을 낱낱이 열거하여 왕조의 운수가 다했음을 논하다가 발각되어 무산되고 말았다.

1592년 임진년 4월 30일 국왕이 왜군에 쫓겨 도성을 떠나 파천(播遷)에 오르자 민심이 이반했다. 분기탱천한 백성들은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왕을 원수로 여겼다.

류성룡의 서애집 기록이다.

“임금의 행차가 성을 나서니 난민들이 맨 먼저 장례원(掌隸院 노비 판결부서)과 형조를 불살랐다. 이 두 곳에는 공사노비의 문서가 있는 까닭이다. 또 내탕고(內帑庫 왕실 개인금고)에 들어가 금과 비단 같은 것을 끌어냈으며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불 질러 하나도 남겨둔 것이 없었다.

역대로 내려온 보화와 귀중품, 문무루(文武樓)와 홍문관에 쌓아둔 서적, 승문원 일기가 모두 타버렸다. 또 임해군과 병조판서 홍여순의 집이 불탔다. 모두 왜적이 오기 전에 우리 백성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임진왜란 첫해 함경도에서 난이 일어났다. 선조는 의주에 머물고 여차하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요동으로 건너가려고 했다. 광해군은 분조(分朝 임시 조정)를 맡아 평안도, 강원도, 호남을 돌면서 백성을 위무하고 의병을 독려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다른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도 같은 임무를 띠고 함경도로 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달이 났다.

그해 7월 함경도 회령 아전이었던 국경인과 그 숙부 국세필 등이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를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투항했다. 두 왕자(임해군·순화군)가 현지에서 근왕병을 모으지는 않고 망나니짓을 일삼자 이들을 포박해서 왜군에게 넘겨주었다. 국경인은 이 공로로 판형사제북로(判刑使制北路)에 임명되어 회령을 통치하면서 횡포를 자행하다가 북평사 정문부의 격문을 받은 회령유생 신세준과 오윤적의 유인에 붙잡혀 참살되었다.

임해군·순화군을 호종했던 신하 김귀영·황정욱·황혁(황정욱의 아들) 등도 현지 백성들의 인심을 사지 못해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황정욱의 아들 황혁은 순화군의 장인이었다. 국왕과는 사돈지간이다. 선조실록에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 만한 사정이 들어 있다.

“황혁은 강원도에서 함경도로 들어갈 때 임금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또 부탁하신 무거운 임무를 잊어버리고 하는 짓거리가 모두 도리에 어긋나고 사나웠다. 고을에서 접대하고 바치는 것이 조금이라도 제 뜻에 차지 않으면 채찍질, 매질을 한도 없이 해댔다. 지나는 곳마다 소동이 일어나 마치 난리를 겪은 것 같았다. 원망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회령의 변고가 일어난 것이다.”

호조판서였던 황정욱은 1589년 정여립의 모반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그는 현지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리다가 국경인의 모반으로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되어 안변의 토굴에 감금되었다. 이때 가토의 지시로 선조에게 항복 권유문을 기초한 게 문제가 되어 동인과 서인 간 정쟁의 빌미가 되었다. 황정욱은 동인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길주에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훗날 다산 정약용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사세를 이렇게 진단했다.

“서쪽 지방 백성들 오랜 세월 억압받아/ 십세(오랜 기간)토록 벼슬 한 장 없었네/ 겉으로야 공손한 체하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나 불만이었네/ 옛날에 일본이 나라 삼키려 했을 때/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서쪽 백성들이 수수방관했음은/ 참으로 그럴만한 이유 있었네.”

전쟁 중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양주의 이능수, 이천의 현몽, 부여의 송유진·이몽학 등이 있었다. 이들의 반란 이유 역시 국경인을 따른 회령의 백성들과 다르지 않았다. 1594년 송유진 등이 창의병(唱義兵)을 자처하며 충청도 천안과 직산 일대에서 세력을 모아 변란을 모의했다.

관군에 붙잡힌 송유진 등은 곧바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왕에게서 직접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군대를 일으켜 도성을 포위한 뒤 광해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결국 주모자로 인정된 송유진 등 100여 명은 선조의 친국이 끝난 뒤 곧바로 광화문 육조거리 앞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국왕은 이후 의병에 대한 적대감과 경계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의병 한답시고 권좌를 넘보는 놈들, 삼족을 멸해야 후환이 없을 것이니 앞으로 내가 친히 국문을 담당할 것이다. 흠.”

또 1596년 병신년 이몽학이 주동이 되어 충청도 홍주(홍성)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사뭇 세력이 강했다. 왜란이 발발한 이후 계속되는 흉년으로 민중들의 생활은 더욱 비참했다. 농사를 지을 사람들이 피난을 갔으므로 농토가 버려졌고 전염병이 창궐해 백성들은 곤죽이 되었다. 급기야 사람을 잡아먹는 지옥도가 펼쳐졌고 하얀 해골바가지가 길가에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당시 조정에서는 명·일 사이에 강화를 둘러싸고 찬반양론으로 나뉘어 논쟁이 치열했다. 일본의 재침을 방비하기 위해 각처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백성의 부담이 가중되자 부역에 동원된 자들의 원성과 고통이 하늘을 찔렀다. 이런 기회를 포착한 이몽학은 불평불만에 가득 찬 백성들을 모아 선동, 반란을 획책했다. 겉으로는 의병을 모집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조정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류성룡은 적이 당황했다. 개혁정치가 이제 막 시작된 때에 일어난 대규모 반란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반란을 진압하는 방법을 두고 류성룡의 고민은 더욱 커졌다.

“당장 진압을 해야 합니다. 제가 내려가 쓸어버리겠습니다.”

“허어, 진압할 장수는 많아요. 단순히 진압만 한다면 민심을 다잡는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니.”

이일의 격한 주장에 류성룡은 점잖게 대꾸했다. 우선 민심부터 다독여야 반란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다.

국왕은 대로했다.

“어느 놈이건 나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은 능지처참형에 삼족을 멸할 것이다. 빨리 잡아오란 말이야!”

그러면서 그동안 난의 주동자는 죽이고 가담한 자들은 놓아주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면서 호통을 쳤다.

이몽학은 본래 왕실의 서얼 출신으로,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전라도 등지를 전전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속관(募粟官 식량 조달관리) 한현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한현과 함께 홍산 무량사에서 모의를 하고 군사를 조련하였다.

동갑회(同甲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친목회를 가장한 반란군 규합에 열중했다. 이몽학은 600∼700명의 승속군(僧俗軍)을 모집했다. 이몽학 일당이 야음을 타고 홍산현을 습격해 현감 윤영현을 붙잡았다. 이어 임천군, 정산현, 청양현, 대흥군, 부여군을 연달아 함락시키자 현감들이 야반도주했다. 이민(吏民 아전과 백성)들도 모두 반군에게 복종하니 그 무리가 수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서산군수 이충길은 아우 3명을 반란군에게 보내 몰래 통하게 했다.

이몽학이 홍주를 침범하자 홍주목사 홍가신은 아전 이희·신수 등을 반군 진영에 보내어 거짓 투항하게 하여 방어에 따른 준비를 갖추면서 무장 박명현·임득의 등 많은 무사들을 규합했다. 충청병사 이시언, 어사 이시발, 중군 이간은 청양에 포진해 장차 홍주로 향하려는 군사의 위세를 떨쳤다. 이몽학은 성의 함락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새벽에 무리를 이끌고 덕산을 향해 달아나자 반란군 중에 도망자가 속출하였다.

“이몽학의 목을 베는 자는 반란에 가담하였다 하더라도 큰 상을 내리겠다.”

목사 홍가신은 이렇게 포고했다. 그러자 반란군 중에서 다투어 이몽학의 목을 먼저 베려는 자가 속출하였고, 결국 반란군 김경창 등에 의해 이몽학은 참수되었다.

이몽학 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반도들의 입에서 나온 “우리의 뒤에는 의병장들이 있다”는 무인사건(誣引事件)은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의병장 김덕령·최담령·홍계남·곽재우·고언백 등이 무고하게 당했다. 그중에서 김덕령과 최담령은 혹독한 심문 끝에 억울하게 장살(杖殺) 당하거나 옥사했다.

호남 의병장 김덕령은 20대 혈기 방장한 호남아로 진주성 전투에서 김천일과 최경회의 의병군이 전멸한 뒤 담양에서 의병을 조직했다. 서인인 성혼의 문인이었던 그는 홍주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러 가다가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그 일로 반란수괴(反亂首魁)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로 끝내 죽어야 했다. 향년 30세였다.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은 ‘춘산곡(春山曲)’이라는 시조를 지어 자신의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토해냈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김덕령의 죽음으로 의병에 나서면 집안이 망한다는 인식이 퍼졌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의 씨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남해안에서 수군 재건을 하던 이순신은 백성들의 신망이 높았으므로 의병이나 승병들이 스스로 모여들었다. 곧 일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애민 사상 여부에 달려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는 관군의 잇단 시비에 염증을 느꼈고 김덕령이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곡기를 끊고 생 솔잎만 먹는 벽곡찬송(辟穀餐松)을 하면서 세상을 피했다. 여러 차례 난을 경험한 국왕의 의심증은 도졌고 그 화살은 이순신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김동철 : 교육학 박사,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 저서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외 다수
김동철 : 교육학 박사,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 저서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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