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이순신의 항명-광화문으로 진격하라 ⑰

2021-07-25
김동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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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임전무퇴만 있을 뿐… 죽고자 하면 살 것

#천행(天幸) 명량해전

 

해남 어란포 바다 한가운데 대기하던 이순신은 탐망군관 임중형의 급보를 받았다.

“장군, 적선이 이미 이진에 도착했습니다.”

“뭐라 했느냐? 우리가 방금 떠나온 곳이 아니더냐. 흠.”

다음날 새벽에 왜선 여덟 척이 어둠을 뚫고 나타났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왜선이었다. 여러 장졸들은 긴장하면서 잠시 동요했다. 경상우수사 배설 또한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호각을 불고 대장 깃발을 휘두르며 단호하게 명령했다.

“왜선을 추격하여 나포하라!”

대여섯 척의 판옥선이 추격에 나섰지만 물살이 거세고 왜선이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으므로 더이상 쫓지 않았다.

그날 밤 이순신은 어란포에서 바다 건너 장도(노루섬)를 거쳐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조선 수군은 점점 해남 우수영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벽파진에 도착하자마자 배설이 도망간 사실을 보고받았다.

“음, 그 못된 자가 마침내 일을 저질렀구나. 추후 추포해서 죄를 물을 것이다.”

그때 탐망군관의 급보가 또 전해졌다.

“장군, 아까 온 왜선은 정탐선이었고 이진에 50여 척의 왜 선단이 대기 중입니다.”

이순신은 눈을 번뜩이며 이를 사리물었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비롯한 장수들을 모아 작전계획을 의논했다. 모두가 중과부적을 말하면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부는 충청도 방면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냈다.

“제장들의 말을 모두 다 들었다. 우리에게는 임전무퇴만 있을 뿐이다. 군인의 무덤은 정해져 있지 않다. 알겠느냐.”

이순신은 “철석같은 신념으로 나아가면 귀신도 이를 피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해이해진 제장들의 군기를 다잡았다.

이순신은 신임 수사 김억추의 어영부영하며 굼뜬 소행이 괘씸했다. 김 수사는 이억기 수사가 칠천량에서 전사한 뒤 서인인 좌의정 김응남의 추천으로 급히 부임한 자였다. 김 수사는 우수영에서 노꾼들의 충원 및 총통과 화약을 갖추는 일을 맡았는데 일이 지지부진하고 더뎠다.

‘으음, 일개 만호(종4품)만도 못한 김억추와 앞으로 어찌 일을 도모해나갈 수 있단 말인가.’

이경(밤 10시쯤)에 야음을 틈타 출몰한 왜선이 포를 쏘아 경보를 울렸다. 이순신은 곧장 나아가 왜선을 향해 연달아 총통을 방포했다. 고요한 밤바다가 진동하면서 붉은 화염에 휩싸였다. 적선은 저항하지 못하고 삼경(자정쯤)에 물러갔다.

“우리 군세를 떠보기 위한 것이니 모두들 경계심을 풀지마라.”

이순신은 이렇게 엄하게 신칙하고 갑옷을 입은 채 배의 뜸 아래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구름을 벗어난 조각 달이 어슴푸레 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수평선마저 사라진 검은 밤바다를 뚫고 당장이라도 왜선이 몰려올 것만 같았다.

“당장 놈들이 들이닥친다면 어떻게 막아야 할까.”

이순신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결전이라면 하루빨리 시간을 당기고 싶었다. 9월 9일은 중양절이었다. 명절을 맞아 집을 떠나 고생하는 군사들의 사기를 올려 주려고 음식을 베풀었다. 녹도만호 송여종에게 부찰사(한효순)에게서 받은 식량과 제주에서 가져온 소 5마리를 건네주었다. 막 뜨끈한 쇠고기 국밥을 먹이려는 때 왜 정탐선 2척이 다가왔다. 영등포 만호 조계종이 끝까지 뒤쫓았으나 잡지는 못했다. 왜군이 보낸 배는 노를 36개나 가진 고바야부네(小早船)로 급행 파발선이었다. 빠른 속도로 날아다닌다고 해서 히갹센(飛脚船)이라도 불렀다.

이순신은 왜선의 잦은 출몰에 머지않아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을 직감했다. 모든 전력을 다 모아 단판걸이로 승부를 내야 하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혈투! 그 시각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1597년 정유년 9월 14일 맑음.

“북풍이 크게 불었다. 벽파 건너편에서 연기가 올랐기에 배를 보내 실어오게 했더니 다름 아닌 탐망군관 임중형이었다. ‘적선 200여 척 중 55척이 이미 어란포에 들어왔다’고 했다. 아울러 적에게 사로잡혔다 도망쳐 온 김중걸이 전하는 말도 있었다. 포로가 된 김해 사람이 김중걸의 귀에 대고 몰래 말하기를 ‘왜놈들이 모여서 의논하는데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쫓아와 혹 사살하고 배를 불태웠으니 매우 통분한 일이다. 각처의 배를 불러 합세해서 모두 섬멸해야 한다. 그 후 곧장 경강(京江 한강)으로 올라가자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혹시나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되어 곧바로 전령선을 보내 피난민들에게 알아듣게 타이른 뒤 급히 육지로 올라가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다음날 밀물 때에 맞춰 장수들을 거느리고 해남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진도)에서 우수영으로 가는 길목에 명량(鳴梁 울돌목) 협수로가 있었다. 이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계시했다.

“이 장군, 명량(울돌목)을 잘 이용하라. 예로부터 울돌목의 물 울음소리는 20여 리 바깥에서도 들릴 정도로 물결이 센 곳이다. 그곳을 잘 이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이순신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그리고는 당장 배를 몰아 울돌목으로 나아가 그곳의 지형지물을 살폈다. 좁은 수로, 빠른 물살, 골바람과 암초 등 지형과 지세가 위험한 천험(天險)의 수로가 아닐 수 없었다.

“아하, 호리병의 목처럼 좁은 저 물길, 거품처럼 솟아오르는 소용돌이, 조류 때만 잘 맞춘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 하늘은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나.”

이순신은 모든 군사들을 집합시켰다.

“적들이 곧 쳐들어올 것이다. 병법에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라 했다. 필히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이다. 또 일부당경 족구천부(一夫當逕 足懼千夫)라 했는데, 한 명이 좁은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즉시 군율로 다스려 한 치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모두들 약속할 수 있겠느냐.”

“충(忠)! 장군님의 뜻을 따라 한목숨을 바쳐 나라와 백성을 구하겠습니다.”

이순신은 13척의 배로 대군을 맞이하려면 이소격중(以小擊衆 작은 세력으로 강한 적을 대적함)의 기습(奇襲)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것도 설파했다.

아니나 다를까, 9월 16일 아침 예상했던 것처럼 엄청난 수의 왜 군선이 바다를 까맣게 뒤덮었다. 이때를 맞춰 이순신은 대나무 뗏목과 통나무를 물살에 실려 보냈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 13척과 초탐선 32척이었지만 고기잡이 민간 포작선 100여 척을 멀찌감치 후방에 배치해 군세를 과시했다. 향토민과 피란민으로 이뤄진 의병(疑兵 적의 눈을 속이는 가짜 병사) 전술이었다.

이순신은 곧바로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게 했다. 저 멀리 적선 130여 척이 닻을 내리고 서 있었다. 여러 장수들은 불리한 형세를 느끼고 회피할 꾀만 내고 있었다.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2마장(약 90m) 밖에 머물고 있었다. 이순신은 대장선의 노를 재촉하며 솔선수범했다.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 현자총통을 이리저리 어지럽게 방포했다. 탄환은 바람과 우레 같이 날아갔다. 총통을 맞은 세키부네들은 여지없이 깨졌다. 군관들은 배 위에 빽빽이 들어서서 불화살을 빗발처럼 난사했다. 완강한 저항이었다.

“적선이 아무리 많아도 조금도 흔들리지 마라. 더욱 심력을 다해서 적을 쏘라.”

여러 장수들은 먼바다에 물러나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호각을 불게 하고 중군에게 명령하는 깃발을 세우고 또 초요기(招搖旗 장수를 부르는 깃발)를 세웠다.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도착했다.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도 가까이 왔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들 어디 가서 살 것이냐.”

이 말을 들은 안위는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진하여 들어갔다.

이어 미조항 첨사 김응함에게도 소리높여 경고했다.

“너는 중군장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피할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형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해 주겠다.”

김응함의 판옥선도 적진으로 돌입했다. 두 배가 먼저 교전하고 있을 때 적장의 지시를 받은 왜군들이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어서 다투어 올라갔다. 안위의 군사들은 각기 죽을힘을 다해 혹은 능장(稜杖 몽둥이) 혹은 긴 창을 잡고 혹은 반들거리는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내리쳤다.

배 위의 군사들이 거의 힘이 다하자 이순신의 장군선이 뱃머리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서 빗발치듯 화살을 난사했다. 적선 3척이 거의 뒤집혔을 때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잇달아 와서 협력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일진광풍이 몰아친 바다는 총포와 조총의 총성, 군사들의 함성으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바다는 점차 핏빛으로 변해갔다.

“장군님, 저 무늬 놓은 비단옷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馬多時)입니다.”

장군선에 탔던 항왜(降倭 항복한 왜군) 준사가 소리를 질렀다. 이순신은 무상(無上 돛잡이) 김돌손을 시켜 갈퀴로 마다시를 낚아 뱃머리에 올리게 하고 바로 시체를 토막 내 머리를 꼬챙이에 꿰어 세우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참수당한 적장 마다시는 세토내해 해적 출신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였다. 구루시마 외에 아다케부네(대장선)에 탄 왜 수군장들은 주요 표적이 되어 온몸에 수십 발의 화살이 꽂히기도 했다.

초전박살! 기세가 오른 장졸들은 스스로 분발하여 힘과 용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애초 이 전투에 참전한 군사들은 두 달 전 칠천량해전에서 끔찍한 전투의 참상을 경험한 패잔병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순신은 전투대형으로 전열을 정비했다.

13척의 판옥선으로 좁은 물목을 따라 일자진(一字陣)을 펴고 “쾅! 쾅! 쾅!” 천자, 지자총통을 연달아 작열시키자 아타케부네와 세키부네는 맥없이 격파됐다. 불화살을 맞은 왜선들은 검붉은 화염에 휩싸여 검은 연기를 뿜으며 서서히 가라앉았다. 왜군들은 추풍낙엽처럼 바다로 떨어졌다. 아악!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좁은 물목을 이용한 이순신의 외나무다리 전법이 주효했다. 오후에 조류가 남동류로 바뀌자 적선은 떠내려갈 듯 밀리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탄 조선 수군은 총통을 연달아 방포했다. 콰과광! 탕! 탕! 총통과 조총의 교차 폭발음으로 땅끝의 산천은 요동쳤다. 왜선 31척이 격파되자 바다는 전사자들의 주검과 통나무, 청죽(靑竹) 다발, 밧줄 등 부유물로 어지럽게 뒤덮였다. 후미에 있던 왜 선단이 방향을 틀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와와와,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군졸들은 물러가는 왜 선단을 바라보며 목청이 터져라 승리의 함성을 질러댔다. 이순신도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군졸들에게 화답했다. 이순신은 온갖 감회에 만감이 교차하는 듯 한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집필묵을 꺼내 “이번 전투는 참으로 천행(天幸)이었다”고 일기에 남겼다.

다음날 어제의 전투 경과를 복기(復碁)해보니 참으로 천행이 맞았다. 조선 수군은 전라우수사 김억추, 미조항첨사 김응함, 녹도만호 송여종, 영등포만호 조계종, 강진현감 이극신, 거제현령 안위, 평산포대장 정응두, 순천감목관 김탁 등 1000여 명이었고 왜 수군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루시마 미치후사 등 1만 4000여 명이었다.

전투 결과 판옥선은 단 한 척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수군 1000여 명 중 순천감목관 김탁, 우수영 노비 계생은 전사했고 강진현감 이극신과 박영남, 봉학 등은 부상했다. 그러나 왜 수군은 133척 가운데 선발대 31척이 모두 분멸됐다. 왜군 1만 4000여 명 가운데 해적 출신 구루시마는 사망했고 도도 다카토라는 중상을 입었다. 죽거나 다친 왜군은 8000여 명에 이르렀다. 완벽한 승리였다.

“으음, 시신은 수습해서 잘 묻어주거라. 비록 적군이지만 고향을 떠나온 불쌍한 고혼들이다.”

이순신 해상 의병들에게 이 같은 지시를 하고 뱃머리를 돌려 서해로 향했다. 조선 수군은 왜군의 기습을 우려해서 달빛을 받으며 밤에 움직였다. 신안 당사도에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어의도에 이르니 수많은 피난민들의 배가 정박하고 있었다.

“장군님 만세! 이자 우린 살아부렀당께로. 감사합니다요.”

피난민들은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 수군에게 환호하며 감사를 표했다. 수군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영광 칠산도를 거쳐 서해를 타고 북상하고 있었다. 부안 고참도에도 피난민들의 배가 무수히 정박하고 있었다. 고군산도에 도착한 날 밤에 긴장이 풀린 탓일까 이순신은 끙끙 앓으면서 식은땀으로 온몸을 적셨다.

겨우 기력을 회복한 이순신은 명량 승첩을 국왕에게 전하러 가는 전령 송한과 큰아들 회를 배웅했다.

‘아, 어찌 가슴이 이리도 아리고 쓰리단 말인가.’

이순신은 그즈음 토사곽란으로 고생을 한 탓도 있지만 고단한 지난날들이 떠올라 심사가 복잡했다. 배 위에 홀로 선 이순신은 상념과 회한에 싸인 듯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아산이고 좀 더 올라가면 강화, 한강, 도성이 될 터였다.

김동철 : 교육학 박사,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 저서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외 다수
김동철 : 교육학 박사,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 저서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 외 다수

✔자유일보에 인기리에 연재되는 김동철의 역사소설 ‘이순신의 항명-광화문으로 진격하라’가 마침내 단행본으로 출간됐습니다. 인터넷은 물론 전국 유명서점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 주문이나 서점 방문이 불편하신 분들은 전화(010-2142-8776)로 문의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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