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싸우면 미래가 없다”… 역사의 현장에 ‘克日 지혜’ 남다

2021-03-18
김동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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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유적 답사기_⑳다크 투어리즘과 ‘오타 줄리아’

진해는 연전연승의 자랑스러운 곳인 동시에 왜성의 흔적 또한 뚜렷이 남아 있는 곳이다. 우리는 항일의식에 머물 것이 아니라 극일의 지혜를 찾아야 한다

 

왜군이 쌓은 웅천왜성.
왜군이 쌓은 웅천왜성.

진해의 제포(내이포)는 부산포, 염포(울산)와 함께 일본인들에게 개항한 3포 중 하나로 태종, 세종대부터 왜관(倭館)이 들어섰던 곳이다. 이순신 수군은 이곳에서 세 번의 전투(합포, 안골포, 웅포)에서 일본 수군에 완승했다. 일본군은 패전 이후 이 지역에 안골포, 웅포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들어갔다.

이순신 수군은 1592년 5월 7일 거제 옥포해전에서 첫 승전고를 울린 뒤 곧바로 합포로 진격, 포구에 정박 중인 일본 전선 5척을 총통으로 격파했다. 이어 7월 10일 안골포에서 한산대첩의 여세를 몰아 대승을 거두었다.

이순신, 원균, 이억기 등 조선연합수군 선단 58척(거북선 3척 포함)이 일본 세키부네 등 대소선 42척을 격파, 분멸한 것이다. 그 이듬해 2월 10일~3월 6일까지 7차례 전투가 벌어진 웅포해전에서 일본 수군 50여 척을 수장시키는 쾌거를 이루며 연전연승했다. 패전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앞으로 조선 수군과 접전을 하지 마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렇듯 진해는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곳인 동시에 웅포와 안골포에 왜성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남해안 왜성을 답사하면서 우리는 항일의식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이 암시하는 어떤 영감과 교훈을 얻어 극일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재가 과거와 싸우면 미래가 없다.” 영국 수상 처칠의 명언을 음미해본다. 웅천왜성을 배경으로 하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임진왜란 이듬해 1593년 1월 제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성 전투에서 패한 뒤 이곳 웅포에 와서 웅천왜성을 쌓았다. 고니시는 평양에서 철수할 때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일곱 살 정도 되는 여자 어린이를 발견하고 이곳으로 데려왔다. 고니시는 천주교인(일본에서 ‘기리시탄’으로 불렀음)으로 전쟁 중에 명나라와 강화 교섭을 먼저 시도했던 협상파였다.

어린이는 고니시의 규슈 고향 집으로 보내졌고, 1596년 5월 일본에서 활동하던 베드로 모레홍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세례명은 오타 줄리아. 오타는 양 할머니(고니시 어머니)로부터 성경과 약재(藥材)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조일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서는 1600년 동·서 두 세력이 자웅을 겨루는 대규모 전투(세키가하라)가 벌어졌다.

공연 포스터 속의 오타 줄리아.
공연 포스터 속의 오타 줄리아.

도요토미를 따르는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붙었는데, 동군이 승리하자 서군인 고니시는 교토에서 처형됐고 그 가족은 멸문지화를 맞았다.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는 오타는 도쿠가와 부인의 시녀가 됐다. 당시 도쿠가와 정권은 천주교 탄압정책을 썼고 수만 명의 기리시탄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오타는 천주교 신자임이 발각되었으나 끝내 배교(背敎)를 거부했다. 도쿠가와는 오타를 도쿄 남쪽 이즈제도의 고즈시마에 유배를 보냈다. 오타는 유배지에서 민족을 초월해 굶주리고 헐벗은 섬사람들을 위해 약물치료를 하는 등 헌신을 다했다. 오타는 지금도 일본에서 성녀(聖女)로 추앙받는다. 고즈시마에서는 1970년부터 매년 5월 그녀를 기리는 ‘줄리아 축제’를 열고 있다.

오타 줄리아는 1960년대 이후 소설, 시, 영화, 뮤지컬, 축제 등의 단골소재로 등장해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로는 모리 레이코의 ‘삼채의 여자’ 외에도 엔도 슈사쿠의 ‘유리아라고 부르는 여자’, 후데우치 유키코의 ‘오타 줄리아의 생애’, 하라다 고사쿠의 ‘오타 줄리아’, 다니 신스케의 ‘주리아 오타’ 등이 있다.

웅천왜성 부근에 세스페데스 공원이 있다. 천주교 신자인 고니시가 1593년 조선 땅에 불러들인 최초의 서양인 신부였다. 세스페데스는 웅천왜성에 1년 정도 기거하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왜성 인근에 2011년 개관한 웅천도요지 전시관이 있다. 작은 가마터로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회청사기, 백자, 제기류 등이 출토됐다.

임진왜란 당시 이곳 도공들은 일본으로 끌려가서 일본 도자기의 세계화에 기여했다. 일본에서 ‘도조(陶祖)’로 추앙받는 이삼평과 박평의 같은 이들이 당시 끌려간 사기장이들이다. 일본은 이들의 기술을 높이 사 장인으로 키웠다. 또 그 기술을 전수 받아 세계적인 아리타 자기 등을 만들어 유럽에 수출함으로써 국부(國富)를 창출했다.

전후 사명대사 유정이 포로 송환차 일본에 갔을 때 조선 도공들은 이미 가정을 이루고 가마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조선은 내 조국이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조선에서 하층민으로 푸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이곳 대명은 우리들의 기술을 칭찬해주고 있다.” 누가 잘못된 것일까.

 

※알림=‘이순신 유적 답사기’는 20회로 마칩니다. 다음 호부터는 역사 소설 ‘이순신의 항명_광화문으로 진격하라’를 연재합니다. 바람 앞의 촛불 형세인 국가위기, 도탄에 빠진 국민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선사할 것입니다. 이순신이 만들고자 하는 나라, ‘재조산하’의 비밀이 공개될 것입니다. 애독을 부탁드립니다.